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여사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이 남자 괜찮은지 좀 봐줄수 있어?"
얘는 꼭 자기가 필요할때만 '오빠'라고 부른다.
"공짜 없는거 알지? 1분당 천원이다. 동의하냐?"
"아! 나 진지하니까 장난하지말고 들어봐~"
녀석은 소개팅한 남자에 대해 아주 디테일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남자는 자기보다 한살 많은 33살이라고 했다. 회사원이라고 했고 키도 크고 어깨가 넓고 몸이 좋다고 했다.
"오~ 이번엔 운동남이야? 근데 그런 남자가 왜 너를..."
"아니, 더 들어보라고!"
"알았어. 진정하셔~"
무표정에 과묵한 스타일, 목소리가 좋고, 여자를 많이 안 만나봤다고 했단다.
"음, 그럴수 있지. 집돌이 같네. 운동 좋아하고 책 많이 읽고~ 맞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대박인게 나랑 음악 취향이 똑같아~ 플레이리스트 공유했는데 많이 겹치더라구!"
녀석은 재즈를 좋아한다. 나는 잘 모르고 듣지 않지만 일본 시티팝을 좋아하는데 플레이리스트가 겹쳤다면 그 남자는 분명 변태...
"아이고 푹 빠지셨구만~ 잘생겼지?"
"응, 잘생겼어. 근데 여자한테 인기 많았을거 같은데 왜 연애를 안했을까?"
"30대 초반이면 사실 바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근데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거 같은데?"
진심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좋은 남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부지런함이다. 나는 배 나온 사람을 싫어한다. 특히 배 나온 남자는 정말 안 좋아한다.
배가 나왔다는 건 게으르단 뜻이다. 과식하고, 혈당 올라서 피곤해지고, 눕는 게 일상인 사람. 그런 생활의 흔적이 뱃살이다. 근데 몸이 좋다? 자기관리 확실한 사람이다. 근육운동은 해본 사람만 안다. 정말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꾸준한 운동, 절제된 식단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치! 나도 그래~"
"야 그럼 끝났네~ 얼른 고백박고 못 도망가게 수갑채워!"
수화기 너머에서 좋아죽겠다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근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사이가 안좋아서 따로 사나봐.."
소개팅을 하러 간다더니 호구조사를 하고 온 줄 알았다.
"그래도 너한테 그런 이야기 하는 거보면 꽤 마음이 있나보다. 보통 그런 이야기 쉽게 안 하거든."
"그런가?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있는데 같이 살고 있다네.."
"그게 뭐 어때서?"
뭘 걱정하는걸까? 아직 사귀지도 않는 소개팅남의 여동생까지 걱정하는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아닌데... 여동생이 오빠를 많이 좋아해서, 외박이나 너무 늦게 다니면 엄청 뭐라고 한다네..."
순간 실소가 나왔다. 나도 여동생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런 여동생은 드라마 속 캐릭터일 뿐이다.
"설마 여동생한테 질투하는 거야?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아, 진짜 짜증나게 하지 말고 좀 진지하게 말해줘!"
"너도 참 ㅋㅋ 너 집을 써~ 좋은집 뒀다가 뭐에 쓸래. 짜파게티 먹으러 우리집 가자고 해~"
"아!!"
녀석을 더 건드리면 폭발할거 같아서 나는 톤을 살짝 진지하게 바꿔서 통화를 이어나갔다.
"솔직히 지금까지 이야기 들었을때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거 같거든? 철이 일찍들고 가정적인 남자인거 같아. 술도 많이 안마시지?"
"아니! 술은 자주 마시는거 같아. 근데 친구가 많이 없다고 했어. 그래서 친한친구 몇명이랑 자주 만난다고 하더라."
"그럼 담배는?"
"전자담배 피는 것 같았어. 근데 냄새는 안 나더라."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술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담배까지 한다는건 살짝 위험했다. 물론 전자담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니코틴이 연초보다는 적게 흡수 되더라도 몸에 안좋은건 마찬가지였다. 운동하면서 술이랑 담배하는 사람이 물론 있긴하지만 그래도 둘다 하는건 좀 마이너스였다.
"직업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가보네. 그래도 끊으라고 잔소리하면 안 돼"
"알지. 그리고 대화가 잘통해서 시간가는줄 몰랐어. 밥먹고 잠깐 걸으면서 내가 터치도 살짝 했는데 팔짱끼고 싶더라."
"그러다 경찰서 가는거야~ 철컹철컹."
여사친은 소개팅남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내 친구가 상처받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첫날부터 그렇게 너무 티를 내 버리면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에프터 신청은 했어?"
"아니.. 아직 연락 없어. 그래서 좀 초조해."
"자신감 가져. 너 화장하고 꾸미면 꽤 괜찮다니까? 그리고 그 나이에 집 있고 차 있는 여자 흔치않아~ 넌 완벽해!"
자존감이 살짝 떨어져 있는거 같아서 조금 과장해서 칭찬 해줬다.
근데 몇개는 팩트였다.
여사친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고 알뜰했다. 아직 은행집이긴 해도 화장실 문짝정도는 지분이 있었다. 보통 놀기 바쁜 20대에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고 사람들 잘 챙기는 의리있는 친구.
"그런가.. 근데 왜 연락을 안할까~ 넌 왜 안하는거 같은데?"
"그거 집착이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고 한번 본거 잖아 그렇게 빠지면 안 돼. 천천히 더 알아가야지. 그리고 뭔가 바쁜일이 생겨서 연락을 못하고 있을수도 있지."
사실 나도 참 궁금했다. 보통 소개팅 할 때 밥먹고 카페 가거나 심지어 그날 술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근데 밥먹고 잠깐 걷다가 헤어졌다는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보통 마음에 들면 오래 같이 있고 싶지 않나.
'허.. 이거 생각보다 강적이다.'
"내 생각은 그래. 연애경험이 별로 없다고 하니까 그런걸 잘 모르지 않을까? 일단 기다려봐."
"언제까지? 나 이대로는 억울해서 잠 못자!"
참 안타까웠다. 남자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일단 진정하고, 니가 여기서 급하게 굴면 정말 그대로 끝이거든? 세상에 좋은 남자 널렸다는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정 안되면 내가 또 소개팅 시켜줄께!"
"아.. 미치겠어. 그런거 필요없어!"
얼마나 대단한 남자길래. 내 친구는 아주 깊이 빠져버린것 같다. 여자들은 이게 문제다. 너무 감정적이라는거. 이럴때 필요한건 평정심과 이성이 필요한데, 그런소리하면 또 상처 받을까봐 말도 못 하겠고, 공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예전에 그런적 있어. 정말 맘에 드는 여자였고,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생각해서 혼자 뜨거워져서 선물하고 연락하고 그랬는데... 결국은 까였어. 그래서 그 마음을 나는 잘알지~"
"아 또 그 이야기냐! 술만 마시면 그 이야기 맨날 하잖아. 아 알겠어. 일단 끊을께."
"어 그래. 푹쉬고 너무 걱정하지마. 진전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내가 내년에 너 꼭 시집보낸다."
내 생각엔 정말 괜찮은 남자다. 여유 있고, 자기관리 잘하고, 가볍지 않은 사람. 아마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타입일 거다.
나도 아직 여자친구가 없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고 위로하냐, 참.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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